2부 | 16강

제16강 싸우며 나아가는 삶, 그리고 영원한 목표

1. 위대한 삶은 모두 ‘투쟁’이다

여러분,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위대한 것을 이루는 일들은 겉보기에는 달라 보여도, 본질적으로는 서로 닮아 있습니다. 과학자든, 예술가든, 신앙인이든, 각자에게 주어진 재능을 꽃피우려면 충실성과 열정, 그리고 전체를 향한 견고한 헌신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삶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기독교가 우리에게 가져다준 새로운 영적 생명을 보존하려면, 우리는 최고의 영적 에너지와 충실함으로 그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이 과정이 ‘투쟁’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과학이나 예술이 내부의 모순과 싸워야 발전할 수 있듯이, 종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 깊이 뿌리박힌 옛 윤리적 성향, 즉 자기중심성과 세상에 대한 욕망은, 믿음과 사랑이라는 새로운 삶의 방향과 필연적으로 충돌합니다.

이 대립은 인간의 본성 때문에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영혼은 이제 세속적인 세상에 매여 있으면서, 동시에 영원하신 하나님께 묶여 있습니다. 이 두 연결은 서로를 위협하며 영혼 안에서 엄청난 긴장과 동요를 일으킵니다.

2. 투쟁에서 승리하는 법

이 흔들리는 투쟁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평온을 찾고 승리할 수 있을까요? 기적적인 도움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천사가 내려오거나 지옥문이 열리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가장 단순하고 확실한 수단이 주어졌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복음, 즉 신앙과 사랑입니다.

이 진리 안에 우리 영혼이 모든 혼란을 극복할 수 있는 내적 집중력이 있습니다. 이 진리를 붙잡을 때, 우리는 투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명확성과 힘을 얻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투쟁의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깨어 기도하라. 그렇지 않으면 시험에 들리라.” (마 26:41)

**‘깨어 있음’**과 **‘기도’**가 바로 그 방법입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안의 새로운 세계(믿음과 사랑)가 옛 세상의 쾌락과 비교되며 공격받을 때, 그 가치가 떨어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때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두 가지를 분명히 확인해야 합니다. 첫째, 신앙이 주는 죄 용서와 평화가 얼마나 생생하고 귀한 것인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둘째, 세상 쾌락의 덧없음과 그것이 우리 영혼에 가져오는 타락을 직시해야 합니다. 이 깨달음을 일시적인 감정으로 흘려보내지 말고, 삶을 통해 계속해서 확인하며 견고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 자신을 다스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 삶에는 삶에 속하지 않으면서 삶을 채우는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것들은 우리를 더 가난하게 만들 뿐입니다. 우리는 **‘단식(fasting)’**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음식뿐만 아니라, 불필요한 음악과 문학, 교제와 오락에 대해서도 단식할 수 있습니다. 쓸모없고 무가치한 삶, ‘잡담처럼’ 허비되는 삶을 피해야 합니다. 단식은 포기이자 자제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삶의 질서를 세우고, 영적인 기관들을 훈련시켜야 합니다.

3. ‘회개’라는 이름의 투쟁

지금까지 말한 깨어 있음과 자기 훈련, 이 윤리적 투쟁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바로 **‘회개(Repentance)’**입니다.

루터의 95개조 반박문 제1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리 주님이시며 선생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은 신자의 삶 전체가 회개여야 함을 의미하셨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회개는 죄에 대한 후회와 슬픔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후회라는 불쾌한 감정은 또 다른 새로운 쾌락으로 대체되려는 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후회는 쉽게 또 다른 죄로 가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개신교적인 회개는, 신앙에서 시작되어 사랑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양심은 이제 믿음과 사랑이라는 기준 앞에서 우리를 정죄합니다. “나는 믿음과 사랑을 증명하지 못했다!” 이 후회와 죄책감은 우리를 다시 믿음과 사랑으로 이끕니다. 죄는 용서를 요구하고, 믿음은 용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죄는 새로운 삶의 힘을 요구하고, 사랑이 바로 그 힘을 줍니다.

회개는 우리를 낮추지만, 그 낮은 곳을 통해 다시 영혼의 높은 곳으로 우리를 이끌어가는 복된 다리입니다.

4. 투쟁의 목표: 그리스도인의 완전

이처럼 기독교인은 윤리적으로 투쟁하며, 종교-도덕적인 발전을 경험합니다. 그렇다면 이 발전이 향하는 목표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기독교적 완전(Christian Perfection)’**입니다.

이것은 ‘죄 없음’이나 조각상처럼 완성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빌 3:13)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빌 3:15)

기독교적 완전은 멈춰있는 상태가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하나님께로, 쾌락과 불신앙으로부터 신앙과 사랑으로 향하는 노력의 완전한 도래, 지속성, 강도를 의미합니다. 이 노력이 우리의 의지와 삶의 방향 전체를 통해 드러날 때, 우리는 완전함에 이른 것입니다.

이러한 기독교적 성격은 우리를 **‘축복(Blessedness)’**으로 이끕니다. 축복은 영혼의 포만감이나 안주가 아닙니다. 그것은 역동적이고 투쟁적인 삶 속에서, 하나님의 가까이 계심을 행복하고도 놀랍게 느끼는 생생한 경험입니다.

5. 마지막 너머의 궁극적인 목표: 영원한 축복

이 땅에서의 목표 너머에는 오직 하나의 궁극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곳으로 가는 길은 **‘죽음’**을 통해서입니다. 우리의 발전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으며, 믿음이 느끼는 영원한 사랑은 우리에게 이 마지막 궁극의 축복을 보장합니다.

그곳은 어떤 곳일까요? 이 세상이 어떤 변화를 겪을지, 죽음 이후 우리 영혼에 어떤 운명이 닥칠지는 오직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다만 우리는 이것을 믿습니다. 죽음 이후에 우리에게는 **‘새로운 삶’**이 주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고전 2:9)

이 영원한 축복은 다채로운 세상의 장막이 걷히고, 우리 영혼의 눈이 그 뒤의 광채를 발견할 때 비로소 드러날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가 매달릴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영원한 사랑에 대한 믿음뿐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의 시간은 짧지만, 영원한 삶으로 가는 길로서는 충분히 깁니다.


여러분! 이것으로 우리는 16번의 긴 강연의 끝에 도달했습니다. 이 시간이 헛되지 않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통치와 믿음, 하나님의 나라와 사랑.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평화와 행동을 가져다주고, 우리 영혼의 모든 필요를 채워줍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부디 이 하나님의 통치와 믿음, 그분의 나라와 사랑이 여러분에게도 삶의 중심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들 외에 그 어떤 것도 참된 가치를 지닐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