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강 예수님이 만드신 공동체, 교회
1. 평화가 아니라 검을 주러 왔노라
여러분,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인류의 역사에 거대한 분열을 가져오셨습니다. 그분 스스로 이렇게 말씀하셨죠.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마 10:34)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더 원하리요?” (눅 12:49)
예수 그리스도라는 역사적 현상 앞에서 인류는 두 개의 큰 진영으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 한쪽은 예수님에게서 새로운 존재와 죄의 용서, 즉 ‘새 언약’을 받아들입니다.
- 다른 한쪽은 여러 가지 이유와 핑계를 대며 그 새 언약을 거부합니다.
예수님의 삶과 그분의 뜻이 향했던 궁극적인 목표는, 믿음과 사랑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새로운 인간’**이 생겨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뜻은 바로 기독교 교회 안에서 실현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뜻은 교회를 만들고, 교회에 활기를 불어넣고, 교회를 유지하는 힘이 됩니다.
2. 흩어진 점들을 하나의 그림으로 본 바울의 통찰
초대 교회의 모습을 한번 상상해 봅시다. 로마 제국 곳곳에 작고 힘없는 기독교 공동체들이 드문드문 흩어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고, 통일된 조직이나 법도 없었으며, 심지어 행동 목표에 대해서도 완전히 합의하지 못했습니다. 어두운 풍경 위에 반짝이는 작은 불빛들 같았죠.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 흩어진 점들 속에서 놀라운 그림을 보았습니다. 그는 낡은 세상이 사라지고 새로운 세상이 태어나는 강력한 불꽃을 보았습니다. 그는 이 작은 공동체들이 결국 하나의 통일된 몸, 즉 **‘교회’**라는 것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어떻게 이런 대담한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그에게 주어진 예언자적 시선이었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는 머리요, 공동체는 그의 몸이다.
- 예수 그리스도는 남편이요, 공동체는 그의 아내이다.
교회는 그냥 사람들이 만든 동호회가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이신 예수님의 뜻이 반드시 이루어지는, 그분의 현존이 충만하게 드러나는 장소입니다. 만약 교회가 세워지지 않고, 여기저기서 몇몇 고독하고 경건한 개인들만 생겨나는 데 그쳤다면, 예수님의 사역은 결국 무너지고 그분의 뜻은 성취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세상의 비판가들이 교회를 향해 외쳤던 “악을 짓밟으라!(Écrasez l’infâme)”는 저주는 결코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기초이자 씨앗은 인간의 설득력이나 순교자의 피가 아니라, 살아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었기 때문입니다.
- 편집자주: 여기서 제베르크는 ‘교회’의 본질을 설명합니다. 교회는 단순히 건물이거나 제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유기적으로 연결된 ‘살아있는 몸’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 ‘몸’이라는 비유는 교회의 통일성과 각 지체(성도)의 중요성을 동시에 강조하는, 바울 신학의 핵심적인 이미지입니다. -
3. 교회의 엔진, 성령
교회라는 공동체를 활성화하고, 구성원들의 말을 통해 강화하고, 깨우고, 자극하는 신적인 힘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이 힘을,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공동체에 보내주신 **‘성령(Holy Spirit)’**으로 이해했습니다.
성령은 각 사람을 다스려 하나님의 나라에 편입시키는, 살아계신 하나님 자신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세상과 일상의 굴레에서 해방시키고, 생명으로 채우는 위로부터 오는 전능한 힘입니다.
이처럼 기독교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뜻’**이 실현된 공동체이자,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써 세워진 공동체입니다.
4. 예수님이 남기신 세 가지 핵심 도구
예수님은 이 공동체가 계속해서 복음을 전파할 수 있도록 세 가지 구체적인 형식과 방법을 남겨주셨습니다.
- 말씀 선포: 인간은 말과 상징을 통해 영향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표현하셨고, 그 말은 듣는 사람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작용합니다. 믿음과 사랑으로 선포되는 말씀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의 도구입니다.
- 세례: 말씀의 일회적인 행위입니다. 세례는 한 영혼이 이제 영원히 하나님께 속했으며, 하나님의 다스림이 그의 삶에 선물과 과제로 작용할 것이라는 사실을 확립하는 예식입니다. (어린 아이에게 주는 유아 세례 역시, 그 아이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보호받도록 맡기는 의미를 가집니다.)
- 성찬: 말씀의 반복적인 행위입니다. 제자들은 성찬을 통해,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 때 그러셨던 것처럼 지금도 그들 가운데 사랑과 능력으로 함께 계신다는 것을 기대하고 경험합니다. 초대 교인들이 성찬을 마치며 외쳤던 “마라나타!”(주여, 오시옵소서!)라는 말 속에는 이러한 간절한 기대가 담겨 있습니다.
- 편집자주: **‘마라나타(Maranatha)’**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사용했던 아람어(Aramaic)로, “우리 주님, 오시옵소서!”라는 뜻의 기도입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성찬을 행할 때마다, 지금 여기에 임재하시는 주님을 느끼는 동시에, 마지막 날에 영광 중에 다시 오실 주님을 고대하는 마음으로 이 기도를 드렸습니다. -
5. 세상 속의 교회, 세상과 다른 교회
교회가 세상에 퍼져나가면서, 복음 전파와 자기 보존을 위해 **‘직분’**과 같은 제도가 생겨나는 것은 필연적이었습니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직분은 **‘설교 직분’**이며, 이 직분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영혼들을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로 이끄는 것입니다.
교회의 사역은 설교를 넘어 교육, 사회 문제 참여 등 다양한 영역으로 확장됩니다. 교회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큰 뜻을 수행하는 **‘인간 정신의 최고 교육자’**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교회의 중요한 정체성이 드러납니다. 교회는 세상 속에서, 세상을 위해 존재하지만, 세상에 속해서는 안 됩니다.
마치 배가 물 ‘위에’ 있어야 항해할 수 있지만, 물이 배 ‘안으로’ 들어오면 침몰하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가 세속화되어 세상의 가치관에 물들어 버리면, 세상에 아무런 가치를 줄 수 없는 무능한 존재가 됩니다.
교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주님일 때 자유롭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으로부터의 내적인 자유가, 역설적으로 교회를 세상과 가장 올바른 관계로 이끌어 줍니다.
결론적으로, 교회의 구원과 불행은 교회법이나 신학 작업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교회를 세우는 것은 주의회 의원이나 신학 교수가 아닙니다. 기독교를 마음속에 효과적으로 만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궁극적으로 교회를 건설하는 이들은, 모든 당파와 학파, 외적인 성공과 영광을 뒤로하고 “오직 예수만을 보는”(히 12:2) 사람들입니다. 그들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위대한 뜻을 이 세상 속에서 실현하는 진정한 교회의 건설자입니다.
교회의 사역이 개별 영혼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