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 12강

제12강 한 분의 예수님, 두 개의 본성: 그 신비의 탐구

1. 역사상 가장 위대한 두 가지 미스터리

여러분, 오늘 우리는 기독교 신앙의 가장 깊은 미스터리 속으로 들어가 보려 합니다. 여기 두 가지 역사적 사실이 있습니다.

  1. 어떻게 역사상 가장 겸손했던 한 인간(예수)이 스스로를 세상의 주님이자 심판자라고 여길 수 있었을까요?
  2. 어떻게 십자가에 달려 죽었던 그 한 인간이, 그의 제자들에게 ‘주님’과 ‘하나님’으로 불리며 숭배받을 수 있었을까요?

기독교의 역사는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기나긴 여정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나 요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는 분명히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지만, 동시에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아버지의 독생자였습니다. 이 땅에서 가르치고 고통받고 죽으신 후, 다시 신적인 영광과 권능을 지니고 교회의 주님으로 영원히 살아계신 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신앙의 ‘고백’일 뿐, 논리적인 ‘설명’은 아닙니다. 이 미스터리를 설명하기 위한 최초의 시도는 **영지주의(Gnosticism)**자들에게서 나왔습니다.

  • 영지주의의 설명: “예수는 인간처럼 ‘보였을’ 뿐, 진짜 인간은 아니었다. 세례받을 때 하늘의 영적 존재가 그에게 임했다가, 십자가에 달리기 직전에 그 몸을 떠나버렸다.” 이것은 예수님의 완전한 인간성을 포기하는 설명이었습니다. 당연히 교회는 이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 편집자주: 영지주의는 1~2세기에 기독교에 큰 영향을 미쳤던 혼합주의 사상입니다. 이들은 ‘영(spirit)’은 선하고 ‘물질(matter)’은 악하다고 보는 이원론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거룩한 신적 존재가 진짜 인간의 몸을 입는다는 것을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고, 예수님이 인간처럼 보였을 뿐이라는 ‘가현설(Docetism)’을 주장했습니다. -

2. ‘두 번째 신’이라는 위험한 아이디어

예수님의 신성을 설명하기 위해, 초대 교회는 당시 철학자들에게 익숙했던 ‘로고스(Logos)’ 개념을 사용했습니다. 로고스는 ‘신의 이성’ 혹은 ‘신의 말씀’을 의미하는데, 이 로고스가 하나님에게서 분리되어 세상에 들어와 인간 예수가 되었다는 설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설명은 더 큰 문제를 낳았습니다. 마치 그리스 신화처럼, 하나님 외에 ‘두 번째 신(a second God)’ 혹은 ‘반신반인(demigod)’이 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입니다.

이 위험한 생각에 맞서 위대한 업적을 세운 인물이 바로 아타나시우스입니다. 그는 단호하게 선언했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다! 아들(예수)과 성령은 아버지와 ‘동일본질(homoousios)’이다.” 즉, 예수님은 아버지와 동등한, 완전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논거는 단순하고 강력했습니다. 예수님은 신적인 힘으로 행하셨기에 하나님이시고, 동시에 온전한 인간의 삶을 통해 그 힘을 드러내셨기에 인간이십니다.

3. 끝나지 않는 논쟁: 두 본성은 어떻게 하나가 되는가?

아타나시우스 덕분에 예수님이 완전한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확립되었지만, 미스터리는 더욱 깊어졌습니다. 어떻게 완전한 하나님이 동시에 완전한 인간일 수 있을까요?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수백 년간 수많은 논쟁이 이어졌습니다.

  • 어떤 이는 “인간 예수에게는 인간의 이성이 없고, 그 자리를 신적인 로고스가 채웠다”고 주장했습니다. (→ “그렇다면 완전한 인간이 아니다!” 라는 비판)
  • 어떤 이는 “신성과 인성은 그냥 분리된 채로 예수님 안에 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 “그렇다면 두 명의 예수가 있는 것인가?” 라는 비판)
  • 또 어떤 이는 “신성과 인성이 하나로 섞여 새로운 제3의 본성이 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 “그렇다면 더 이상 완전한 신도, 완전한 인간도 아니다!” 라는 비판)

마침내 서기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교회는 최종적인 결론을 내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한 인격(one person) 안에, 두 개의 본성(two natures, 신성과 인성)을 가지고 계신다. 이 두 본성은 섞이지도, 변하지도, 나뉘지도, 분리되지도 않는다.”

이것은 교회의 공식적인 교리가 되었지만, 사실상 ‘이해할 수 없으니 그대로 믿으라’는 선언에 가까웠습니다. ‘본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모호하고 철학적이었기 때문입니다.

4. 루터의 통찰, 그리고 우리가 나아갈 길

시간이 흘러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이 낡고 어려운 교리에 새로운 빛을 비춰주었습니다. 루터는 두 본성이라는 교리를 강력하게 옹호했지만, 그 내용을 다르게 이해했습니다.

루터에게 하나님의 본질은 철학적인 ‘실체’가 아니라 **‘사랑의 인격적 영적 의지’**였습니다. 그리고 이 영원한 사랑의 에너지가 예수의 ‘인간 영혼’을 가득 채웠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신성입니다.

- 편집자주: 제베르크는 여기서 신학사에서 가장 어려운 ‘기독론(Christology)’ 논쟁을 압축적으로 요약한 후, 루터의 통찰을 통해 현대적인 해답을 제시합니다. 핵심은 ‘본성(nature)’이라는 철학적 개념에서 벗어나, ‘의지(will)’와 ‘인격(person)’이라는 관계적, 실존적 개념으로 예수님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의지’와 ‘예수의 의지’가 완벽하게 하나가 된 인격적 연합이 바로 신성과 인성의 결합이라는 설명입니다. -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길을 보여줍니다.

예수는 추상적인 ‘인간성’이 아니라, 강력한 개인적 삶을 살았던 개별적이고 풍부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영혼의 삶의 내용은 외부로부터 주어집니다. 우리를 채우는 궁극적인 내용은 바로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이 두 가지를 예수님께 적용해 봅시다. 하나님의 뜻은 인간 예수를 자신의 도구로 선택하여, 그를 통해 당신의 본질을 가장 명확하게 표현하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인간 예수가 존재하는 첫 순간부터 하나님은 그와 결합하여 그의 감정과 의지를 관통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영혼에는, 그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이 아닌 생각이나 감정, 노력이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 나의 양식이니라.” (요 4:34)

이것이 예수님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내용이자 힘이었습니다.

결론: 살아있는 관계로 이해하는 신비

그러나 하나님의 이 효과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죄의 한계가 아니라, **‘인간적 척도’**의 한계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저 세상에서 되기를 바라는 바로 그 존재, 즉 하나님의 기관으로서 무한하고 놀라운 능력을 가지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동시에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서 사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영혼의 비밀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인격이 예수 안에 거하셨고, 예수의 개인적인 의지와 감정과 분리될 수 없게 결합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결정적인 의지가 매 순간 예수 안에서 인간의 자기 결정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두 얼굴, 즉 다스리심과 겸손을 이해하게 됩니다. 예수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고,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 안에서 살고 행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삶은 하나님의 삶이었기에, 우리는 결코 그 경지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시작하는 분이고 우리는 따르는 자이며, 예수는 소유한 분이고 우리는 추구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라면, 예수님께 일어났던 일, 즉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일이 언젠가 우리에게도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선(善)이 승리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세계사의 원칙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 원칙이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이루어졌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입니다.

예수님, 그분은 하나님의 뜻을 단순히 수동적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신적인 존재로서 그 뜻을 적극적으로 수행하신 분입니다. 하나님과의 연합은 예수님께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의 신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