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 11강

제11강 죄는 어디에서 왔고, 누가 우리를 구원하는가?

1. 막다른 길에 선 인류: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

여러분, 우리는 지난 시간에 ‘죄’가 우리 영혼을 파괴하는 악이며, 지울 수 없는 죄책감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이 끔찍한 진실 앞에서 인류는 늘 ‘구원’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해 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원이 우리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 내면의 저급한 본능을 누르고, 우리 안에 있는 신의 음성, 즉 이성과 양심을 따르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외침처럼 말이죠.

또 어떤 사람들은 **‘죽음’**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감각 세계라는 빛나는 족쇄가 끊어지는 순간, 우리의 영혼은 영원한 빛 속에서 참된 기쁨을 얻게 될 것이라는 희망입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이 모든 생각에 단호하게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죄의 문제를 그 누구보다도 깊고 심각하게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이해하는 죄의 힘은, 인간 스스로의 노력이나 심지어 죽음조차도 무력하게 만드는 너무나 강력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왜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원자인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 우리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선한 생각이나 선한 행위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왜냐하면 죄는 단순히 몇 가지 잘못된 행동이 아니라, 우리 영혼의 기본 방향 설정 자체가 잘못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단편적인 행동에서만 하나님보다 세상을 우선시하는 것이 아니라, 전반적이고 전체적으로 하나님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스스로 끊어버린 사람에게는 그 관계를 회복할 연결고리가 남아있지 않습니다.
  • 다른 사람이 우리를 구원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류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살아가지만, 그 영향력은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우리를 죄의 굴레에서 근본적으로 구원해 줄 수는 없습니다.

2. 최초의 죄, 그리고 끝없는 확산

그렇다면 이 죄는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세상에 죄가 있다면, 그것은 인간을 통해 존재합니다. 죄는 인류의 역사에 속한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인간이 먼저 죄를 지었어야만 합니다.

그 최초의 죄는 단지 개인의 잘못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에, 한 사람의 생각과 행동은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인류의 가장 위대한 선(善)이 말과 행동을 통해 전달되듯이, 악(惡)과 죄 역시 똑같은 방식으로 퍼져나갑니다.

여기에 또 다른 요소가 더해집니다. 인간은 역사적 존재입니다. 한번 표현된 생각과 한번 행해진 행동은 다음 세대에 계속 영향을 미칩니다. 마치 한번 굴러가기 시작한 눈덩이가 점점 커져 눈사태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 죄의 확산: 인간의 힘(능력)이 서로 부딪히며 죄가 되었고(예: 질투),
  • 죄의 심화: 인간의 반목(갈등)은 죄를 더욱 깊게 만들었으며(예: 가인과 아벨),
  • 죄의 다양화: 인간의 상호작용은 죄를 온 세상에 퍼뜨렸습니다(예: 바벨탑).

인간의 개성과 상황이 다양하듯이, 죄 역시 수만 가지의 다른 색깔과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세상의 모든 자극과 가치는 이제 죄의 유혹이 되었습니다.

- 편집자주: 제베르크는 여기서 성경 창세기의 이야기들을 예로 들며 죄의 ‘사회성’과 ‘역사성’을 설명합니다. 죄는 단지 개인의 내면적인 문제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발생하고 역사를 통해 축적되며 구조화되는 강력한 힘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원죄(Original Sin)’ 개념의 배경이 되는 통찰입니다. -

여기서 한 가지 모순처럼 보이는 질문이 생깁니다. “인간의 본성은 기독교가 말하는 고귀한 삶을 위해 만들어졌다면서, 어떻게 이렇게 쉽고 빠르게 죄에 물들 수 있는가?”

죄는 겉보기에 매력적인 이익이나 쾌락의 모습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죄는 늘 선(善)의 가면을 쓰고 나타납니다. 저급한 욕망은 항상 ‘신과 같이 되려는 마음’이나 ‘자유’라는 그럴듯한 문구로 자신을 포장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이미 그랬듯이 말이죠.)

또한, 자연은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의 효율을 추구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인간 역시 미숙할수록 더 쉬운 길, 더 낮은 목표에 만족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죄가 바로 그 ‘쉬운 길’을 제공했던 것입니다.

3. 구원자는 어디에 있는가?

이처럼 죄가 보편적이라면, 우리는 인간 중에서 구원자를 찾을 수 없습니다. 서로 영감을 줄 수는 있어도, 근본적으로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죽음이 구원이라는 희망 역시 의미가 없습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는 미지의 영역(X)일 뿐입니다. 그 미지의 X에 자신의 구원을 맡기는 것은 비논리적입니다. 현재의 삶에서 행복을 경험하지 못한 영혼이, 죽는다고 갑자기 행복해질 수는 없습니다. 죽음은, 살아있을 때 이미 구원받은 사람만을 구원합니다.

그렇다면 구원은 어디에 있습니까? 기독교는 그 구원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다고 주장합니다.

루터의 소교리문답은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를 모든 죄에서, 죽음에서, 그리고 악마의 권세에서 구원하신 분입니다.”

역사적 인물로서의 예수님을 생각해 봅시다. 그분은 보잘것없는 환경에서 태어나셨지만, 그분의 삶과 가르침이 남긴 유산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것이었습니다.

  • 예수님은 하나님의 통치와 죄 사함이라는 **‘새 언약’**의 유산을 경험하고 살아내셨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 위대한 사상을 복잡한 신화와 민족주의적 광신 속에 가두어 버렸지만, 예수님은 그 본질을 단순하고 강력하게 회복시키셨습니다.
  • 예수님은 하나님을 전능한 통치자이자 자비로운 아버지로 느꼈고,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 것을 가장 깊이 확신했으며, 그 나라를 섬기는 것 외에 다른 기쁨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역사상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참된 신자(Believer)**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처럼 하나님과 완벽하게 하나 된 예수님이 동시에 자신을 세상의 주님이라고 선언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었고, 그분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 인간의 의무라고 하셨습니다.

가장 겸손한 종이면서 동시에 세상의 주님이신 예수님. 이 이중적인 삶의 신비 속에 바로 구원의 비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한 인간으로서 우리를 대신해 고통받으셨고, 동시에 주님으로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이 놀라운 역설은 다음 시간에 더 깊이 탐구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