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 10강

제10강 우리 안의 그림자, 죄의 본질

1. 새로운 질문: “과연 우리가 할 수 있을까?”

여러분, 우리는 지금까지 기독교가 약속하는 고귀하고 위대한 영혼의 삶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어쩌면 가장 정직하고 고통스러운 질문이 우리 마음속에 떠오릅니다.

“나약하고 죄 많은 우리 인간이, 과연 그렇게 위대한 삶을 살아낼 수 있을까?”

이 질문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신앙인들이 던졌던 질문이기도 합니다. 교회의 위대한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회심하기 전 이 문제로 처절하게 고뇌했고,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수도원에서 자신의 죄 문제와 씨름하며 절망적인 외침을 토해냈습니다. “나의 죄, 죄, 죄!”

세상에는 오직 하나의 끔찍하고 무서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입니다. 그리고 세상에는 오직 하나의 가치 있고 위대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인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힘입니다.

오늘은 바로 그 ‘죄’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 편집자주: **아우구스티누스(354-430)**와 **마르틴 루터(1483-1546)**는 기독교 역사상 자신의 죄 문제와 가장 치열하게 씨름했던 인물들로 꼽힙니다. 제베르크는 죄의 문제를 단순히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처럼 한 인간의 실존을 뒤흔드는 깊은 고뇌의 문제로 다루고자 합니다. -

2. 죄를 어떻게 볼 수 있을까?: 밝은 빛 속의 먼지처럼

우리는 어떻게 죄의 실체를 제대로 인식할 수 있을까요? 세상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물론 세상에는 고통과 절망이 가득하지만, 동시에 쾌락과 성공을 찬양하는 시끄러운 소리에 그 비명이 묻혀버리기 일쑤입니다.

죄는 마치 잠행성 질병과 같습니다. 병에 걸린 사람은 스스로 괜찮다고 느끼지만, 실제로는 전혀 괜찮지 않은 상태인 것이죠. 건강을 되찾은 사람만이 자신이 얼마나 아팠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죄의 깊이와 심각성은 오직 더 높은 차원의 삶, 즉 성령과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만이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어두운 방은 먼지가 잘 보이지 않지만, 밝은 햇살이 들어오는 순간 공기 중의 수많은 먼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죄의 상태를 가장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역설적으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영적으로 더 깊어질수록, 자신의 죄에 대한 이해 또한 더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3. 죄의 본질: 잘못된 방향 설정

그렇다면 죄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기독교의 본질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죄의 본질은 바로 그 반대, 즉 ‘세상을 향한 믿음과 사랑’**입니다. 하나님께 “아니오(No)”라고 말하고, 세상에 “예(Yes)”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마음속 깊은 곳에 무언가 궁극적인 것을 믿고, 최고의 이상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의 ‘신’이자 삶의 ‘확신’입니다.

  • 어떤 사람은 세상의 주도적인 인물이나 ‘현대인’의 의견을 자신의 최고 권위로 삼습니다.
  • 어떤 사람은 상황과 습관, 여론의 힘을 자신의 주인으로 따릅니다.

그들이 듣는 것, 그들을 지배하는 것은 **‘세상의 목소리’**입니다. 세상이 그들의 최고 권위자입니다. 영원한 권위와 힘이신 하나님의 조용한 음성이 들려올 때, 그들은 귀를 닫아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불신앙(Unbelief)’**입니다.

믿는 대로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목적을 사랑합니다. 세상을 믿는 사람은 세상과 그 재물을 사랑합니다. 이것이 그가 추구할 수 있는 최선의 것입니다. 그 재물은 돈이나 권력일 수도 있고, 명예나 쾌락, 혹은 고상한 이념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결국 우리 자신, 즉 우리 안의 더 열등하고 하찮은 것을 섬기는 일로 귀결됩니다. 겉으로는 고상해 보이지만, 그 핵심에는 **이기심(Selfishness)**이 가득 차 있습니다. 쾌락은 많지만 사랑은 적고, 이상주의는 많지만 영원한 이상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만이 이기주의의 속박에서 벗어납니다. 자신을 찾는 영혼은 결국 자신을 잃어버리지만, 하나님의 삶에 자신을 내어 맡기는 사람은 자신을 백배로 다시 얻게 됩니다.

4. 죄의 결과: 공허함, 그리고 죄책감

세상이 주는 것들은 우리를 결코 만족시키지 못합니다. 마치 파우스트가 “멈추어라, 너는 정말 아름답구나!”라고 외치고 싶은 순간을 갈망했지만 결코 찾지 못했던 것처럼, 세상이 주는 행복은 늘 불완전하고 우리를 배신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속고 속이며, 거짓으로 자신을 유지합니다. 이것이 죄이며, 모든 죄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죄는 그 자체로 벌(罰)입니다.

  • 죄는 우리를 억압하고, 살아있는 시체로 만듭니다.
  • 나의 죄는 다른 사람의 죄를 불러일으키고, 다른 사람의 죄는 나의 죄를 벌합니다.
  • 죄는 우리에게서 죄책감(Guilt)을 낳습니다.

죄를 짓는 사람은 자신의 존재 목적에 실패하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죄책감에 싸여 있습니다. 이 죄책감은 영혼 전체를 찌르고 상처 입히는 가시 옷과 같습니다.

이것이 죄의 실체입니다. 존재의 공포입니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영혼의 삶을 제대로 알지 못하며, 이것을 아는 사람은 자신의 최선조차 악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 역주: 제베르크는 고대 그리스 비극에 등장하는 **‘복수의 여신들(Erinnyen)’**을 죄책감의 강력한 은유로 사용합니다. 이 여신들은 죄인을 끝까지 추격하여 괴롭히는 존재입니다. 즉, 죄책감이란 한번 지은 죄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실존적 공포를 의미합니다. -

이제 우리 존재에 대한 마지막 질문이 남습니다. 우리 삶의 마지막 말을 하는 것은 누구일까요? 우리를 끝까지 추격하는 ‘복수의 여신들(죄와 죄책감)’일까요, 아니면 우리를 구원하는 ‘예수 그리스도’일까요? 이것이 우리가 다음 시간에 마주해야 할 질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