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강 딱딱하게만 느껴지는 ‘교리’, 왜 필요할까?
1. 신앙의 두 가지 장애물: 기적과 교리
여러분, 오늘날 많은 사람이 신앙을 갖기 어렵게 만드는 두 가지 큰 장애물을 꼽으라고 하면, 보통 **‘기적(Miracle)’**과 **‘교리(Doctrine)’**를 이야기합니다.
지난 시간에는 ‘기적’의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기적의 핵심은 자연법칙을 깨뜨리는 신비한 현상 자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리 영혼을 변화시키는 ‘영적인 사건’에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오늘은 두 번째 장애물인 ‘교리’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가져오신 것은 ‘새로운 삶’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삶을 영적인 보물처럼 경험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느끼는 경험이었고,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한 활동이었습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리 위대한 영적 경험이라도 그것을 담아낼 ‘형식’과 ‘질서’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경험한 신앙을 이해하고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려면,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개념’**과 **‘언어’**가 필요합니다. 마치 우리가 느낀 감동을 시나 노래로 표현하는 것처럼 말이죠.
교리는 바로 우리의 영적인 자산과 신앙의 경험을 표현하는 수단입니다.
더 나아가, 이 영적인 자산은 한 개인의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 주어진 **‘공동의 것’**이었습니다. 신앙은 공동체 안에서 공유되고, 보존되고, 다음 세대에 전파되어야 했습니다.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탄생한 공동체가 바로 **‘교회(Church)’**입니다.
2. 경험은 어떻게 교리가 되는가?
하지만 인간 사고의 비극이 여기서 시작됩니다.
우리가 처음 어떤 위대한 경험을 할 때, 그것은 전체적이고 통합적으로 다가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그 경험을 분석하고, 정리하고, 간결한 개념으로 바꾸려는 욕구를 느낍니다. 더 명확하게, 더 깊이 이해하고 싶기 때문이죠. 신앙의 경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의 뜨거운 경험은 점차 정리된 신앙고백으로 형태를 갖추어 갔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외우는 **‘사도신경’**이 바로 그 가장 오래된 공식 중 하나입니다.
이 과정에는 장점과 단점이 있습니다.
- 장점: 우리는 신앙의 내용을 더 단단히 붙잡고, 잘못된 이해(이단)로부터 진리를 보호할 수 있습니다.
- 단점: 살아있던 경험은 딱딱한 공식으로 축소되고, 풍성했던 의미는 단순한 개념으로 가난해질 위험이 있습니다.
마치 봄에 나무를 가득 채웠던 수천 송이의 꽃 중에서, 가을에 열매로 맺히는 것은 몇 개뿐인 것과 같습니다. 정신의 역사에서도 수많은 생생한 경험들이 몇 개의 ‘교리’라는 열매로 남게 됩니다.
- 편집자주: 제베르크는 여기서 교리의 필연성과 위험성을 동시에 지적합니다. 그는 교리를 단순히 ‘하나님이 주신 절대 진리’나 ‘인간이 만든 불필요한 굴레’로 보지 않습니다. 교리는 뜨거운 신앙 체험을 보존하고 전달하려는 인간 정신의 자연스러운 활동이지만, 그 과정에서 원래의 생명력을 잃어버릴 수 있는 ‘비극적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
이러한 인간 사고의 비극 때문에 교회의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때로는 실망감(체념)과 안타까움을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이 주신 그 순수하고 생명력 넘치던 복음이 어쩌다 이렇게 복잡하고 딱딱한 교리로 변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죠.
하지만 동시에 희망도 느낍니다. 이집트의 무덤에서 발견된 수천 년 된 씨앗이 다시 싹을 틔우듯이, 교리라는 껍질 속에 담긴 생명의 씨앗은 결코 죽지 않고, 때가 되면 다시 효력을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사에는 퇴보도 있었지만, 분명 진보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희망은 체념보다 강합니다.
3. 교리는 ‘정답’이 아니라 ‘방향’이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이 교리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교회 안에 있다는 것은 교리 아래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의식하든 못하든, 우리는 교리문답과 찬송가, 예배 의식과 설교를 통해 이미 교리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리의 학문적 공식 그 자체가 아닙니다.
- 교리는 하나님이 직접 주신 계시가 아닙니다. 인간이 만든 것입니다. 교리는 특정 역사적 상황 속에서, 교회를 위협하는 잘못된 가르침(이단)에 맞서 진리를 수호하기 위한 신학적 투쟁의 결과물입니다.
- 우리가 교리에 동의하는 것은, 그 과학적 표현이 완벽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2000년 전의 과학적 개념으로 만들어진 교리가 오늘날에도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 공식이 담고 있는 **‘종교적 의미’와 ‘의도’**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의 신성을 옹호했던 아타나시우스의 신학적 ‘의도’에는 동의할 수 있지만, 그의 철학적 표현 방식까지 그대로 따를 필요는 없는 것과 같습니다.
- 교리는 처음부터 모든 교인에게 ‘옳다’고 강요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단지 오래되었다는 이유만으로 ‘틀렸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교리에 대한 판단은 깊이 있는 검토를 통해 내려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교리 없는 기독교가 더 낫지 않을까요?”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오늘 기독교를 새로 시작한다 해도, 인간 본성과 공동체의 필요 때문에 결국 **‘새로운 교리’**를 만들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교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옛 교리’가 되어 비슷한 문제에 부딪히게 될 것입니다.
4. 교리는 ‘딱딱한 것’이 아니라 ‘유연한 것’이다
여기에 교리에 대한 가장 흔하고 큰 오해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교리가 한번 정해지면 변하지 않는 ‘경직된(rigid)’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생각은 틀렸습니다. 교리는 오히려 엄청난 ‘유연성(flexibility)’과 ‘확장성(expandability)’ 때문에 강합니다.
모든 교리는 그 본질상, 하나의 포괄적인 **‘종교적 경향(religious tendency)’**을 표현합니다. ‘종교적 경향’이라는 말 속에는 무한한 생각과 감정이 포함될 수 있으며, 다양한 조합과 관계를 허용합니다.
따라서 옛 표현(교리)은 계속 유지될 수 있습니다. 그 표현이 가리키는 것이 더 포괄적이고, 그것이 탄생한 정신적 투쟁이 더 치열할수록, 그 표현은 더 오래 지속되고 새로운 인식을 담아낼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됩니다.
교리가 신앙의 성장을 방해한다면, 그것은 교리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교리를 **‘해석하는 사람들’**의 문제입니다. 그들이 ‘경직’되어 새로운 통찰력을 얻지 못하면, 그들은 교리마저도 ‘경직’된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 편집자주: 제베르크의 이 통찰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는 교리를 ‘정답이 적힌 상자’가 아니라, ‘보물을 찾아가는 방향을 가리키는 이정표’로 봅니다. 이정표(교리) 자체는 옛날 것이지만, 그것이 가리키는 목적지(하나님)로 가는 길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새롭게 해석되고 발견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교리 문자에 얽매이는 것이 아니라, 교리가 가리키는 ‘방향’과 ‘정신’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
결론: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우리는 교리에 대해, 그리고 종교적 인식을 표현하는 다양한 형태에 대해 다르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안에는 항상 새로운 인식이 있을 수 있고, 또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점점 더 깊이 이해해야 할 의무와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안에서는 **‘교회가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만이 지속됩니다. 학문적인 신학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신학에서 정말 가치 있는 것은 궁극적으로 실천적이고 교회적인 경향을 가질 때입니다.
자, 지금까지 우리는 기독교의 진리를 ‘증명’하는 예비 질문들을 다루었습니다. 이제 다음 강의부터는 기독교의 개별적인 **‘기본 진리들’**이 무엇인지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그 첫 번째 주제는 **‘하나님에 대한 기독교적 인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