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 5강

제5강 믿음과 사랑, 그 진짜 의미를 찾아서

1. 세상 속의 ‘기이한 존재’, 그리스도인

여러분,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세상에서 ‘기이한 존재(a strange creature)’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나눈 이야기를 잘 따라왔다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등지고 숨어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 한가운데 서서 세상이 주는 기쁨과 가치를 마음껏 누립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 세상보다 더 위대하고 강력한 무언가가 존재하며, 인간 노력의 최종 목표치고는 이 세상이 너무나 하찮다고 주장합니다. 마치 전설 속 영웅처럼 오직 가장 강한 주군만을 섬기고, 그 주군이 가리키는 길만을 따라가고자 하는 사람들이죠.

이것은 언뜻 보기에 엄청난 모순처럼 들립니다. 세상의 힘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그 너머의 무한한 힘을 갈망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역설은 현실입니다. 그리고 이 현실의 중심에 바로 **믿음(Faith)**과 **사랑(Love)**이 있습니다.

  • 믿음은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우리의 응답입니다.
  • 사랑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우리의 응답입니다.

이 두 가지가 없다면, 하나님의 통치도, 나라도 우리에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믿음’과 ‘사랑’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기독교가 말하는 본질과 너무나 다르다는 데 있습니다. 오늘은 그 오해의 껍질을 벗겨내고 진짜 의미를 찾아봅시다.

2. 당신이 아는 ‘믿음’은 진짜 믿음이 아니다

사람들은 흔히 **‘믿음’**을 **‘지식’**의 반대말이나 아래 단계로 생각합니다.

  • 지식: 확실한 것, 증명된 것 (강함, 완전함)
  • 믿음: 불확실한 것, 가능성, 개연성 (약함, 불완전함)

“잘 모를 때 믿는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러다 보니 ‘믿음’이라는 단어 자체에 거부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교회가 “증명할 수 없는 교리나 오래된 기적 이야기를 무조건 ‘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할 때, 그 거부감은 더욱 커집니다. 많은 젊은이가 깊은 고민 없이 믿음을 버리는 모습을 보면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사랑’**에 대한 이해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기독교적 사랑을 그저 인간적인 감정의 연장선으로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 마음, 그렇게 함으로써 나 자신도 행복을 느끼는 것, 서로에게 ‘즐거운 것’을 주는 행위 정도로 말이죠. 가족 간의 사랑이나 친구 사이의 우정 같은 개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합니다.

만약 이런 통속적인 의미의 믿음과 사랑을 가지고 기독교의 위대한 진리들, 예를 들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같은 말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내가 몇 가지 교리를 사실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신다”는 식의 터무니없는 결론에 이르게 될 겁니다. 진지한 사람이라면 이런 말에 분노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기독교가 말하는 믿음과 사랑의 본질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만 합니다.

- 편집자주: 제베르크는 당대의 많은 사람이 ‘믿음’을 지적인 동의(intellectual assent)로, ‘사랑’을 감정적인 애착(emotional affection)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가 보기에 기독교의 믿음과 사랑은 이런 차원을 훨씬 뛰어넘는,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방향 전환을 의미하는 실존적인 사건입니다. -

3. 기독교적 믿음이란 무엇인가?

기독교의 믿음, 즉 **신앙(信仰)**은 처음부터 이론적인 교리나 기적 이야기에 대한 동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순수하게 개인적이고, 실천적이며, 직접적인 경험입니다.

우리는 설교나 성경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그분의 사랑과 의지에 대해 듣습니다. 하지만 처음에는 그것이 우리에게 그저 하나의 이론적 개념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마치 오래된 교과서 속의 죽은 지식처럼 말이죠.

그런데 어느 순간, 새로운 무언가가 우리 삶에 들어옵니다. 우리는 그 개념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들은 우리에게 실질적인 진리가 되고, 살아있는 힘이 됩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느낍니다’.

무엇을 느낄까요? 우리와 우리 삶을 향한 전능한 의지를 경험합니다. 우리를 휘어잡고 결정하는 영적인 권위를 느낍니다. 우리의 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낍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통치(the reign of God)**와 그것을 통한 세상의 구원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 강력한 느낌에 저항합니다. 마치 눈에 이물질이 들어간 것처럼 불편하고 어색합니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그 진리 앞에 압도되어 복종하게 됩니다. 우리 안에서 거대한 생각과 감정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리는 기꺼이 하나님의 효과, 의지, 권위를 받아들입니다.

이러한 ‘수용(acceptance)’, ‘내적인 복종(internal submission)’, ‘순종(obedience)’, ‘신뢰(trust)’가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하나님만을 대상으로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의식하게 될 때, 우리 영혼 안에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낡은 세상이 아닌 새로운 세상에 둘러싸여 있음을 느낍니다. 말씀이 힘이 됩니다. 이 힘은 우리 안에서 주변으로 계속 퍼져나갑니다. 세상은 이제 우리에게 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표면적인 현실 너머에 숨겨진 또 다른 그림, 즉 하나님의 전능한 사랑의 세계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4. 기독교적 사랑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위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힘, 즉 그분의 통치를 경험할 때, 우리는 동시에 새로운 **‘목표’**를 얻게 됩니다. 목적을 갖는 것보다 더 큰 선물은 없습니다. 이 선물은 곧바로 우리에게 **‘과제’**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목적은 바로 구원, 축복, 삶, 만족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지배가 작용하는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입니다.

이 목적에 나 자신을 헌신하고, 내 모든 힘을 다해 그것을 위해 일하고 봉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먼저 하나님을 향합니다. 나를 진정으로 다스리는 주인이자 권위가 되신 그분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분이 사랑하시는 다른 사람들 또한 사랑하게 됩니다. 사람들을 섬김으로써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죠. 어떻게 섬길까요? 그들 역시 하나님의 통치를 느끼고 그분의 나라를 섬기도록 돕는 것, 그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아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영혼을 세우고, 내면을 성장시키며, 삶을 확장시키는 힘입니다. 사랑은 위협하거나 짓밟지 않고, 자유롭게 하고 생명을 줍니다. 사랑은 일시적인 만족이 아니라 영원한 만족을 추구합니다. 사랑은 자신에게 묶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묶는 것입니다.

자, 이제 우리는 믿음과 사랑이 무엇이며, 그것들이 어떻게 내면적으로 연결되어 있는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믿음과 사랑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다스림과 그분의 나라가 있다”는 말이 더 이상 거미줄에 매달린 것처럼 가볍게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 우리의 논의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개인의 주관적인 종교성처럼 보이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엄연히 역사적인 실체이며, ‘교회’라는 공동체를 형성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 객관적인 기독교에 접근해야 할까요? 이 질문은 다음 시간에 풀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