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 4강

제4강 절대적 종교의 증명: 기독교는 환상이 아니다

1. 우리는 또다시 깊은 골짜기 앞에 섰다

여러분, 등산을 하다 보면 이런 경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드디어 정상이 눈앞에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가까이 가보니 그 너머에 더 깊은 골짜기와 새로운 봉우리가 나타나는 경험 말입니다. 우리의 생각 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시간 우리는 기독교가 논리적으로나 영적으로 ‘절대적 종교’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이걸로 모든 증명이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우리는 더 깊고 근본적인 질문의 골짜기와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그 모든 것이 정말 ‘실재(reality)’하는가, 아니면 단지 인간의 소망이 만들어낸 정교한 ‘환상(fantasy)’인가?”

주권자이신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는 정말로 존재하는 것일까요?

게다가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비교 대상으로 삼았던 고대의 종교들은 오늘날 우리에게 큰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 기독교와 경쟁하는 상대는 훨씬 강력합니다. 위대한 철학자들이 세운 깊이 있는 세계관들, 예를 들어 불교적 비관주의, 진화론적 행복주의, 그리고 니체의 ‘초인(Übermensch)’ 사상 같은 것들입니다.

이 사상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신의 지배’는 끝났다고 선언하며, 인간 스스로가 행복의 주인이자 신이 되어야 한다고 외칩니다. 파우스트의 독백처럼 말이죠.

이 땅에서 나의 기쁨은 솟아나고, 저 태양은 나의 고통을 비춘다. 저 너머의 세상은 우리에게 닫혀 있으니, 그곳을 바라보는 자는 어리석을 뿐! 굳건히 서서, 여기 주변을 둘러보라!

이런 강력한 현대 사상들 앞에서, 기독교는 이제 낡고 초라한 유물처럼 보이는 걸까요? 마치 박물관 한구석에 겨우 자리를 차지한 옛 종교처럼 말입니다.

2. 현대 사상은 우리의 영혼을 채울 수 있는가?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여기서 단호하게 고백하고자 합니다. “현대적”이라고 불리는 그 모든 사상과 이상들은 결코 굶주린 영혼을 채워주지 못합니다.

초대 교회의 위대한 사상가 테르툴리아누스는 **“인간의 영혼은 본래 기독교적이다(Anima naturaliter christiana)”**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인간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갈망은 오직 기독교만이 채울 수 있다는 뜻입니다.

왜 그럴까요? 현대 사상들의 약점을 두 가지 질문으로 파헤쳐 봅시다.

첫째, 그 사상들은 우리 영혼의 실질적인 필요를 충족시키는가? 현대 사상들은 자연과 역사의 ‘진보’ 속에서 행복을 찾으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나’의 영혼은 그 거대한 진보 속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습니까? 나는 전체의 일부일 뿐, 결코 진보의 완성을 맛보지 못합니다. 나는 행복을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결코 완전한 행복에 이르지 못합니다. 이것은 끔찍한 모순이 아닙니까? 내가 생각하는 이상(진보와 행복)과 내가 살아가는 현실(유한함과 불완전함)이 서로 충돌하는 것입니다.

‘초인’이 되라는 외침은 어떻습니까? 그것은 공허한 메아리일 뿐입니다. 어떻게 가야 할지 길을 알려주지 않으면서 무작정 강해지라고만 외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비관주의에 빠져 모든 것을 포기하면 위로를 얻을 수 있을까요? 인간은 ‘죽어가는 꽃’이 아니기에, ‘의지 없음’이라는 이상은 우리에게 아무런 힘도 주지 못합니다.

불교의 노래: “세상의 재산이 사라져도 슬퍼 마라,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기독교의 찬송: “그들이 육신, 재산, 명예, 자녀, 아내를 빼앗아 가도, 아무런 이득이 없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에게 남아있어야 한다!

보십시오. 기독교는 공허한 ‘아무것도 아님’에 대해, **‘하나님의 나라’**라는 긍정적인 결론으로 응답합니다.

3. 기독교의 실재성,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이제 마지막 단계에 도달했습니다. 기독교가 선포하는 것이 정말로 ‘실재’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과거에는 “성경에 쓰여 있으니까!”라는 대답으로 충분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였고,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으므로 성경은 진리라는 논리였죠.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이 대답에 만족할 수 없습니다. 성경 안에도 인간 저자들의 오류나 모순이 발견되기 때문이며, 더 중요하게는 다른 사람의 확신만으로는 나의 신앙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진리는 반드시 나 자신의 경험에서 나와야 합니다.

- 편집자주: 제베르크는 여기서 ‘성경의 무오성(inerrancy)’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을 비판하고, ‘개인의 경험’을 통한 신앙의 실재성 증명을 강조합니다. 이는 당시 자유주의 신학의 흐름을 반영하면서도, 그가 얼마나 ‘살아있는 신앙’을 중요하게 생각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실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철학적으로 복잡한 논의는 잠시 접어둡시다. 우리는 어떤 사건이나 존재의 **‘효과(effect)’**를 내 안에서 지속적이고 일관되게 경험할 때, 그것을 ‘실재한다’고 확신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의 선한 영향력을 계속해서 받으며 내 안에 기쁨과 존경심이 생긴다면, 나는 그 사람의 ‘선함’이 실재한다고 믿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실재성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말씀과 행동으로 자신을 드러내셨고(계시), 우리는 오늘날에도 그분의 **‘실재적인 현존(real presence)’**을 경험합니다. 이것은 기독교인의 가장 깊고 내밀한 경험이며, 바로 이 경험을 통해 우리는 기독 교인이 됩니다.

이 경험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믿음’**과 **‘사랑’**입니다. 나는 나를 완전히 복종시키는 어떤 절대적인 권위를 느끼고, 동시에 최고의 활동을 하도록 나를 자유롭게 하는 힘을 경험합니다. 이 경험은 너무나 강력해서, 나를 둘러싼 세상의 어떤 것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나는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이 ‘믿음과 사랑’이라는 영적인 경험(주관적 실재)을 통해, 이 경험을 일으키는 원인인 ‘하나님의 통치와 그분의 나라’(객관적 실재)가 존재함을 확신하게 됩니다.

“내가 존재한다면(내가 믿고 사랑하는 존재라면), 그분도 존재하신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가 환상이 아니라는 최종적인 증명입니다. 이것은 차가운 철학적 논증이 아니라, 한 영혼이 하나님을 만나 체험한 뜨거운 고백입니다. 우리는 믿음과 사랑의 실재를 ‘설명’하거나 ‘강요’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실재를 ‘인식’하고 ‘증명’하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여정의 정상에 섰습니다. 기독교는 절대적 종교이며, 그 내용은 주관적 상상이 아닌 객관적 실재입니다. 다음 시간부터는 이 정상에서 기독교의 진리들이 무엇인지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