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 2강

제2강 인간의 종교들, 그리고 ‘절대적 종교’

1. 다시 정리해 봅시다: 인간은 왜 종교를 필요로 하는가?

여러분, 지난 시간에 우리는 종교의 기원과 본질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오늘 논의를 이어가기 전에 핵심 내용을 다시 한번 정리해 볼까요?

첫째, 종교적 사상이나 ‘신’ 개념은 컴퓨터 기본 프로그램처럼 인간에게 처음부터 내장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둘째, 하지만 인간의 정신은 종교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즉 ‘종교적 소양’을 갖춘 상태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 의존에 대한 갈망: 인간은 연약한 존재이기에,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줄 초월적이고 전능한 존재에게 의지하고 싶어 합니다.
  • 활동에 대한 열망: 동시에 인간은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 하기에,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을 수 있는 궁극적이고 초월적인 목표를 필요로 합니다.

‘신’이라는 개념은 우리에게 의지할 대상을, ‘하나님의 나라’와 같은 초월적 목표는 우리에게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이렇게 종교는 인간의 가장 깊은 두 가지 본능적 필요를 모두 채워줍니다.

- 편집자주: 제베르크는 여기서 종교의 보편적인 기능을 설명합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의존성’과 ‘목적성’이라는 두 가지 특성이 종교를 필연적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키워드를 기억하면 그의 논리를 따라가기 훨씬 수월합니다. -

2. 종교의 역사: 채워지지 않는 영혼의 갈증

인간의 정신은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일 때, 늘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익숙한 것과 연결해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신’이라는 위로부터 온 개념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세상, 즉 자연의 질서나 장엄함(밤하늘의 별, 계절의 변화 등) 속에서 신을 찾으려고 애썼습니다.

그 결과 역사 속에서 수많은 신들과 종교적 개념들이 생겨났습니다. 마치 거대한 나무가 자라면서 수많은 가지를 뻗어 나가듯이 말이죠. 한번 자리를 잡은 종교적 관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동시에 불필요한 가지들을 쳐내는 **‘종교 개혁’**의 과정도 보여줍니다. 모든 종교는 더 단순하고 본질적인 형태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을 통해 스스로를 정화해 왔습니다.

시간이 흘러 예수님이 오시기 직전의 시대, 즉 헬레니즘-로마 시대로 가봅시다. 당시 사람들은 깊은 정신적 혼란을 겪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종교와 철학이 뒤섞여 있었죠. 키케로 같은 철학자들은 낡은 신들의 이야기를 버리고 이성적이고 보편적인 진리를 찾으려 했지만, 그들의 철학은 너무 차가워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종교의 힘이 사라져 버린 것이죠.

세상은 거대한 불안과 끝없는 갈망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영혼들은 텅 빈 우주를 헤매는 나그네와 같았습니다. 그들은 삶의 시작과 끝, 존재의 궁극적인 목적을 알고 싶어 했습니다.

  • 철학의 한계: 플라톤 같은 위대한 철학자는 눈에 보이는 세상 너머에 완전한 진리, 즉 **‘이데아(Idea)’**의 세계가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데아’는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개념이었죠.
  • 현실의 한계: 하지만 사람들의 실제 삶은 법을 지키고, 국가에 충성하고, 예의를 차리는 등 작고 현실적인 목표들, 즉 **‘이상(Ideal)’**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생각(이데아)은 저 멀리 하늘에 떠 있는데, 행동(이상)은 너무나 땅에 붙어 있었던 겁니다. 신은 너무 멀리 있고, 삶의 목표는 너무 가까이 있었습니다. 영혼의 ‘의존에 대한 갈망’과 ‘활동에 대한 열망’ 중 어느 것도 제대로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영혼은 위로부터 오는 영적인 힘을 간절히 바랐지만, 그 힘은 오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때가 찼다”**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고대 종교와 철학이 마침내 그 한계를 드러내고 종말을 맞이한 순간이 온 것입니다.

3. 기독교의 특별한 주장: “나만이 절대적 진리다!”

바로 그때, 세상에 새로운 종교가 등장했습니다. 다른 모든 종교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주장을 하는 종교, 바로 기독교였습니다.

모든 종교는 나름대로 ‘내가 진리다’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훨씬 더 강력하고 배타적으로, **“나만이 유일하고 절대적인 종교다”**라고 선포했습니다.

이 주장이 당시 사람들에게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아시나요? 당시 로마는 ‘판테온(Pantheon, 萬神殿)’이라는 신전을 지어 제국 내의 모든 신들을 한자리에 모실 만큼 종교적으로 매우 관용적인 사회였습니다. 그런데 유독 기독교인들만은 아주 혹독하게 박해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바로 기독교의 이 ‘절대성’ 주장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신들을 인정하지 않는 ‘불관용적인’ 종교로 보였던 것이죠.

기독교는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하나님을 알 수 없다.”
  •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 “세상의 다른 모든 신은 악마에 불과하다.”

이 모든 주장의 핵심은 단 하나입니다. 기독교만이 참된 종교이며,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 완전한 평화와 구원을 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확신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자라는 선포, 이것은 단지 죽어서 천국 가는 문제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 “나는 생명의 떡이다.” (요 6:35)
  •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요 14:6)

이 말씀들처럼, 기독교는 이 땅에서의 삶 역시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온전해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인류의 모든 어둠을 밝히는 태양이며, 다른 모든 종교를 심판하는 기준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런 주장이 너무나 오만하고 독선적으로 들릴 것입니다. 세상의 위대한 사상가들과 선한 사람들의 삶이 모두 무의미하다는 말처럼 들리기 때문이죠. 예수님은 정말 그렇게 편협하고 온화하지 못한 분이었을까요?

4. 기독교의 ‘불관용’은 정말 나쁜 것인가?

사람들은 기독교의 절대성 주장이 ‘불관용’이라고 비판합니다. 진리라면 모든 것을 포용하는 ‘관용’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관용’에도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 회의주의에서 나오는 관용이 있습니다. “진리가 무엇인지 아무도 확실히 모르니, 모든 주장은 나름의 가치가 있다”고 말하는 태도입니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결국 ‘다수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유행하는 사상’을 진리의 기준으로 삼게 됩니다. 겉으로는 관용적인 척하지만, 자신들의 기준에서 벗어나는 ‘극단적인’ 생각은 조금도 용납하지 못하는 위선에 빠지기 쉽습니다.

둘째, 확신에서 나오는 진정한 관용이 있습니다. 이것은 내가 믿는 진리에 대한 강력한 확신에서 출발합니다. 나는 내가 믿는 것이 진리라고 확신하기에, 다른 사람이 나와 다른 것을 믿는 것 역시 그의 ‘진리를 찾을 권리’라고 존중해 줍니다. 그의 생각을 힘이나 논쟁으로 꺾으려 하지 않습니다. 오직 그가 스스로 확신을 얻을 때까지 기다려 줍니다. 이것이 바로 도덕적 관용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관용을 실천하셨습니다. 그분은 진리에 대해 누구보다 강한 확신을 가지고 계셨지만, 누구에게도 믿음을 강요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기독교의 주장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질문이 남습니다. “기독교가 ‘절대적 종교’라는 것을 과연 증명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서는 다음 강의에서 함께 다루어 보도록 하겠습니다.